민방위 훈련 그리고 솔개 이야기
민방위 훈련에서 들은 전설의 ‘솔개’
얼마 전 민방위 훈련을 다녀왔다. 교육을 담당하신 영관급 장교님이 열정적인 목소리로 솔개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다. 자기계발서나 강연 좀 들어봤다 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그 이야기다.
“솔개는 약 70년을 살 수 있는 장수하는 새입니다. 하지만 40년쯤 살면 고비가 찾아옵니다. 부리는 길게 자라 가슴을 찌를 듯 휘어지고, 발톱은 무뎌지며, 깃털은 두꺼워져 날기 힘들어집니다.
이때 솔개는 죽느냐, 사느냐의 선택을 합니다. 산 정상에 올라가 바위를 쪼아 낡은 부리를 깨버립니다. 그러면 새 부리가 돋아나고, 그 부리로 발톱을 뽑고 깃털을 뽑아내어 환골탈태합니다. 이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친 솔개는 다시 30년을 더 살아갑니다.”
교훈: “우리도 솔개처럼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하여 혁신하고 변화하자.”
좋은 말이다. 안주하지 말고 변화하자는 그 뜻은 충분히 알겠다. 하지만 이야기를 듣는 내내 30대인 나의 이성적인 뇌 한구석에서는 삐딱한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.
‘어라? 새가 부리 없이 밥은 어떻게 먹고 살지? 뼈인 부리가 다시 자라나나?’
팩트체크: 솔개는 정말 부리를 깰까?
교육이 끝나고 집에 오자마자 궁금증을 참지 못해 찾아봤다. 결론부터 말하자면, 이 이야기는 생물학적으로 완벽한 허구다.
1. 이야기의 출처
이 우화의 시초를 거슬러 올라가면 과거 모 일간지의 칼럼에서 “독수리처럼 환골탈태하자"라는 내용으로 처음 등장했다고 한다. 이후 누군가가 쓴 우화 경영 관련 서적에서 ‘독수리’가 ‘솔개’로 바뀌어 살이 붙고 각색되어 퍼진 것으로 보인다.
2. 전문가들의 의견
실제로 이 내용에 대해 조류 전문가들이 인터뷰한 기사들이 있었다. 반응은 냉담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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구태회 교수 (당시 경희대 환경·응용화학대학장 / 전 조류학회장):
“얼토당토않은 얘기다. 생태학적으로 부리가 다시 날 가능성은 없다.”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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권순건 수의사 (에버랜드):
“조류는 부리를 다치면 먹이를 먹지 못해 생명 유지가 힘들다.”
3. 과학적 사실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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솔개(Kite)나 독수리의 평균 수명은 야생에서 길어야 20~30년 정도다. 70년은 불가능하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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조류의 부리는 손톱처럼 계속 자라긴 하지만, 뿌리째 뽑거나 깨버리면 다시 자라지 않는다. 무엇보다 부리가 재생되는 수개월 동안 먹이를 못 먹어 굶어 죽는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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깃털 갈이는 모든 새가 매년 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지, 40년 만에 한꺼번에 뽑는 고행이 아니다.
결론
“변화와 혁신"을 강조하기 위해 만든 감동적인 우화가 사실인 양 퍼진 케이스다. 만약 이 이야기가 40~50대 이상의 감성을 건드리는 스토리텔링이라면, 팩트와 검증을 중시하는 요즘 세대(특히 스마트폰으로 바로 검색해 보는 30대들)에게는 오히려 “말도 안 돼"라며 신뢰를 떨어뜨리는 역효과를 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.
물론 그 장교님이 전하려던 혁신의 의지만큼은 잊지 않기로 했다. (단, 부리는 깨지 않는 걸로…)